『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문예중앙, 2011.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진득함이 부족한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동시에 읽는다. 이 책 읽다가 좀 따분하면 저 책을 읽고, 저 책을 읽다가 또 다시 지루하면 요 책을 읽고…….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보니, 현재 무려 5권의 책을 동시에 보고 있다. 그 5권의 책 중 한 권이 박범신의 소설『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이다.
내게 소설은 셀러드 같은 것이다. 어렵고 무거운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가볍게 읽는 그런 장르이다. 그런데 박범신의 이 소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거웠지만, 술술 잘 읽히기는 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반은 지인의 상가喪家에서, 너머지 반은 지하철에서 읽었다.
박범신의 소설이 왜 가볍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작년에 읽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의 삶을 그린 『고산자』도 결코 가벼운 책은 아니었는데. 박범신이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였다는 사실도, 장편 소설만 39권을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왕성한 활동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제목부터 기이하다. 손에 말굽이 자라고, 그 말굽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파멸한다는 기이한 설정을 갖고 있다. 작가는 이것이 '마술적 리얼리즘'과 '하드고어'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우리사회가 여전히 야수적인 폭력사회를 못 벗어났다는 성찰로부터 비롯된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책 말미에 이 소설에 대한 논문이 실려있다. 어렵다. 대충 소재목만 보고 넘겼다. 꼭 그렇게 어려워야하나 싶다.
폭력의 역사는 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문명은 거창한 '공존공생'을 구호로 내세우지만, 역사를 보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것과 다르지 않다. 문명이란 더 가지기 위한 전쟁일 뿐. 깊은 산 속, 외딴 바닷가, 혹은 도심의 어느 변두리에서 은둔은 이런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문명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자들은 일체의 문명을 거부한다. 그 문명에 대한 거부는 곧 폭력의 숙주로서의 문명에 대한 거부이고, 이를 통해 심신의 평화를 얻고자하는 노력으로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폭력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정직한 주먹질 발길질은 차라리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말굽이 주인공에게 말하는 대사는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 결국 우리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합법적 폭력은 언제나 뒤에 숨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내고야 만다.
"폭력을 행사할 일이 설령 생겨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거든. 이른바 합법을 가장해서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자고 생각한 거야. 법에 걸리는 폭력을 휘두르는 건 오히려 순진한 짓이야. 합법적인 폭력이 더 좋은 전술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지. 세상에 나와 보니까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온통 똘마니들뿐이라는 걸 보고 느꼈던 거야."(본문 361쪽)
문제의 본질은 문명과 함께 시작한 인간 욕망의 무제한적 팽창이다. 더 가지기 위해서 제일 간편한 방법이 폭력이 아닌가? 인간의 욕망을 덜어내자는 금욕주의자들의 말이 구호로 그쳐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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